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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8-05-05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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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오나라의 손권(孫權)을 설득하여 유비와 연합하게 하였고, 적벽의 싸움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쳤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자신의 아들 유선(劉禪)을 보좌하되, 아들이 무능하면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를 취하여도 좋다고 유언하였으나 제갈량은 끝까지 후주(後主) 유선을 보필하였다.

적벽대전[赤壁大戰]

중국(China) 후한 말기(後漢) 208년에 후베이성[湖北省] 자위현[嘉魚縣]의 북동, 양쯔강[揚子江] 남안에 있는 적벽에서 조조와 유비손권의 연합군이 싸웠던 전투.

원소(袁紹)를 제압하고 화북(華北)을 평정한 조조는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남하, 손권과 대치하였다.

춘추시대 제 환공 (齊 桓公)이 동곽야인을 만나러 갔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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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에 유비는 제 환공의 고사를 인용하여 두 아우를 설득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것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水魚之交]에 비유하였다.
`영화 ‘적벽대전’의 화공 scene`

[제갈량(諸葛亮)과 관련된 고사성어 & 문장 ]

齊桓公欲見東郭野人 (제환공욕견동곽야인)
유비가 제갈양을 만나기 위해 예의를 다하자 관우와 장비가 분통을 터뜨렸다. 214년(건안 16) 유비는 성도(成都)를 평정하고 나서 그를 군사장군(軍師將軍)으로 삼아 자신이 출병한 뒤 군량과 병사를 대도록 하였고, 촉한의 황제에 오른 뒤에는 그를 승상(丞相)으로 삼았으며, 죽음을 앞두고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대업을 이루도록 당부하였다. 후인들이 중국(China) 곳곳에 무후사(武侯祠)를 지어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제갈량(諸葛亮)의 업적]

천하 삼분지계 (天下三分之計)

유비가 삼고의 예로 제갈량을 맞이했을 때, 공명이 유비에게 제시한 계책.
``천하삼분지계]` 즉, 북쪽의 조조와 강동의 손권이 위용을 떨치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북부와 강동은 현재 유비에게는 어려우니, 이 때 유비가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여 오와 우호관계를 맺고 조조를 치면 능히 천하를 도모 할 수 있다는 내용의 계책이다.

그러나 상승하는 위나라에 비하여 국력의 열세가 뚜렷한 가운데 오장원(五丈原)에서 위나라의 사마의(司馬懿)와 대치하다가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 오나라의 고육지책에 넘어간 조조는 황개의 화공 전선과 방통의 연환계로 인하여 전선이 거의 불타버리고 대부분의 병사를 잃고 화북으로 패주하였다. 소설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신기묘산(神機妙算)으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것으로 묘사되지만, 歷史서인 《삼국지(三國志)》에는 별다른 활약상을 찾아볼 수 없으며, 형주와 익주 등 강남을 손에 넣은 유비가 제갈량을 군사중랑장(軍師中郎將)으로 삼아 영릉(零陵)계양(桂陽)장사(長沙) 등 3군(郡)을 감독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세간에 구전하는 제갈량의 초인적 지략은 대부분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기인하지만, 유비의 신임을 받아 중용된 것은 소설과 歷史서의 기록이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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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제갈량(諸葛亮)]

[제갈량(諸葛亮)의 생애]

제갈량(諸葛亮) [181 ~ 234]
자는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후(忠武侯)
낭야군 양도현(瑯郡 陽都縣;山東省 沂南縣)출생.
호족(豪族)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형주(荊州;湖北省)에서 숙부 제갈현(諸葛玄)의 손에서 자랐다.

이듬해 오나라의 손권(孫權)을 설득하여 유비와 연합하게 하였고, 적벽의 싸움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쳤다. 후한(後漢) 말의 전란을 피하여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일컬어짐.

207년(건안 12)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였다. 위나라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전출사표(前出師表)》와 《후출사표(後出師表)》는 이를 읽고쓰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충정으로 가득한 천고의 명문으로 꼽힌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것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水魚之交]에 비유하였다. 재차 오나라와 연합하여 위나라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省略) 여 민치(民治)를 꾀하고, 윈난[雲南]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한의 경영에 힘썼다. 후한(後漢) 말의 전란을 피하여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일컬어짐.

207년(건안 12)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였다. 이 결과 손권의 강남 지배가 확정되고 유비도 형주와 익주에 세력을 얻어 천하 3분의 형세가 확정되었다. 소설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신기묘산(神機妙算)으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것으로 묘사되지만, ...

[주제: 제갈량(諸葛亮)]

[제갈량(諸葛亮)의 생애]

제갈량(諸葛亮) [181 ~ 234]
자는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후(忠武侯)
낭야군 양도현(瑯郡 陽都縣;山東省 沂南縣)출생.
호족(豪族)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형주(荊州;湖北省)에서 숙부 제갈현(諸葛玄)의 손에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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